중앙 아시아, 내외몽골, 전중국이 일대 사기극에 뒤흔들리다.
청나라와 티베트의 외교적 파트너쉽이 이루어질 무렵에 대한 시대적 상황은 앞선 이 글에서 설명한 바 있다. 이러한 파트너쉽을 이루어낸 달라이 라마 5세는 역대 달라이 라마들 중에 가히 최고라고 해도 좋을만한 엄청난 입지를 가지고 있었고, 이는 수천년의 역사 관념에서 유일무이한 세계의 지존적 자리에서 통치를 한다는 중화세계의 군주라 해도 일방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청나라와 티베트의 대등한 관계는 이 무렵의 이야기이다.
문제는 아무리 위대한 종교 지도자라고 할 지라도, 인간의 몸으로 태어난 이상 영원히 살 수는 없는 법이라는 점이다.
순치 9년, 달라이 라마 5세가 베이징을 방문하기 전의 일이다. 어느 날, 달라이 라마는 철방사(哲蚌寺)에서 색랍사(色拉寺)로 향하던 길에 라싸 북부에 있는 귀족 중맥파(仲麥巴)의 저택에서 하룻 밤을 묵었다. 그날 밤 중맥파의 아내는 달라이 라마의 시중을 들었고, 그 이듬해 태어난 아이가 바로 상게 갸초 (桑結嘉錯 Sangye Gyatsho)였다.
세라사(색랍사)의 모습
저방사(철방사)의 모습
샹게 가초
진실은 당사자들만이 알겠지만, 여러 사람들은 상게 갸초가 달라이 라마의 아들일 것이라 여겼다. 달라이 라마는 상게 갸초가 8살이 되자 그를 포탈라궁으로 불러들여으며, 직접 교육을 시키며 애지중지 하였다.
샹게 가초는 26살이 되자, 달라이 라마 5세의 추대로 수많은 승려들의 환호성 끝에 제파(第巴 티베트어로 데파 sDe-Pa)로 추대되었다. 제파란 말하자면 섭정으로서, 유일한 존재인 달라이 라마 밑에 있는 최고의 관리였다.
이 제파 임명에 대한 이야기도 알고 보면 곡절이 있다. 달라이 라마 5세가 법왕으로 자리 잡을 당시, 이를 도와준 사람은 오이라트 4부족 호쇼트부(예전에는 화석특和碩特이 뭔지 고민을 해야 했다. 중국 측 책으로 오이라트나 티베트 관련 정보를 접하면 이게 문제다. 대체 중맥파진열가조仲麥巴陳列嘉措가 누군지 내가 어떻게 안단 말인가?)의 구시 칸(Gushi-khan 顧實汗) 이었다.
모든 일에는 대가가 있는 법이니, 그 이후로 달라이 라마에 대해 구시 칸의 영향력이 컸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구시칸이 사망하고, 그 아들인 다얀(Dayan) 칸(http://zh.wikipedia.org/wiki/%E8%BE%BE%E5%BB%B6%E9%84%82%E9%BD%90%E5%B0%94%E6%B1%97)이 1668년 사망하자, 이를 기회로 삼은 달라이 라마 5세는 칸이 공석인 틈을 타 재빨리 자기 마음대로 제파를 임명했다.
이후 새로 즉위한 구시칸의 손자, 달라이 칸(達賴汗 Dalai Khan http://zh.wikipedia.org/wiki/%E8%BE%BE%E8%B5%96%E6%B1%97)은 어쩔 수 없이 이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자신의 정치력으로 영향력을 키운 달라이 라마 5세가, 손아귀에 집어넣은 제파 임명권을 이용해서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것이 바로 "제파" 상게 갸초 였던 것이다.
구시 칸. 그의 호쇼투 부족은 1635년 경 본래 있던 오이라트 공동체를 떠나 10만의 무리가 코코노르 부근으로 이주했다. 그들이 떠나기 전에 먼저 코 우를르크가 이끄는 토구트가 25만의 무리로 볼가강을 향해 떠났는데, 이들이 바로 건륭제 시절 오이라트가 절멸당하고 귀환한 이들이다.
그 심모원려한 달라이 라마 5세가 이렇게 자신의 비밀 무기로 열심히 키운것이 상게 갸초 였으니, 자연히 상게 갸초 역시 야심이 큰 젊은이가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상대가 나빠도 너무나 나빴다. 당시 중화제국에는 희대의 괴물이 있었다.
위기의 제국의 군주로 즉위한 강희제는 궁중 내에 있던 오배의 세력을 쳐내고, 삼번의 난이라는 엄청난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는데 성공 했다. 또한 대만의 정씨 왕조를 굴복시켰고, 이제는 러시아와 몽골 등 북방의 문제에 골몰하고 있었다.
강희제가 걱정하고 있는 몽골 문제란 이러하였다. 당시 할하 몽골의 형세를 보면, 우익(서쪽)에는 자삭투 칸과 알틴칸, 좌익(동쪽)에는 투시예투 칸과 체첸 칸이 포진하는 형세였다. 강희제 즉위년인 1662년, 자삭투 칸(Jasaghtu) 완슈케는 다른 부족장 롭장에게 살해되었다. 그 후 여러 차례 좌익과 우익의 분쟁이 계속 발생했는데, 이걸 일일히 설명하는건 오히려 정신이 산만해질 것이다. 일단 간단하게 말하자면 지지고 볶고 하다 1686년에서야 강희제의 협박 등으로 인해 여러 몽골 왕공들이 모여 화합을 함으로서 대충 형세가 진정이 되었다.
그런데 해결이 되었다고 생각한 문제는 오히려 여기서 또 터지게 되었다. 할하 몽골이 아닌 오이라트 몽골 준가르의 가르단이 이의를 제기한 것이었다.
가르단이 주장한 문제는 "젭종단바 쿠툭투" 라는 인물의 문제였다. 젭종단바 쿠툭투는 할하 좌익의 투시예투 칸에 동생으로, 몽골의 최고 불교 승려이자, 자신이 달라이 라마와 동격이라고 주장하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가르단은 젊은 시절 라싸에 가서 공부를 했기 때문에, 달라이 라마는 자신에게 있어 영혼의 스승이었다. 그런 그에게 저런 얼치기는 참을 수 없는 존재였는데, 이 화합에서 젭종단바 쿠툭투는 (가르단의 생각에)달라이 라마의 하급자이면서도, 달라이 라마의 대변인 바로 건너편에 앉음으로서 성직자의 위계를 어겼다.
안그래도 가르단은 할하의 분쟁에서 우익의 투시예투 칸 편 대신 좌익의 자삭투 칸에 편을 들고 있었기에, 투시예투 칸을 칠 가능성은 아주 농후하였다. 실제로 가르단은 투시예투 칸에 불만이 있는 사람들을 모으고 있었다. 그런데 이에 겁을 먹은 투시예투 칸은 오히려 자신이 먼저 선제 공격을 퍼부었고, 이 과정에서 가르단의 동생이 사망하였다.
스승에 대한 불경, 그리고 동생의 죽음. 격분한 가르단은 총공격을 감행해서 할하 몽골 전체를 뒤흔들어 버렸다. 가르단은 "난 달라이 라마의 영혼을 위해 싸웠다." 고 주장했고, 화해를 권하는 강희제에게 "내 동생의 죽음을 어떻게 보상한단 말이냐. 내가 전력을 기울이면 6년이면 할하를 멸망시킬 수 있다." 고 큰소리를 쳤다.
가르단
이후 골치거리가 되어버린 가르단과 강희제의 대결이 펼쳐졌다. 이 싸움에서 군사적 원정은 작은 부분을 차지하고, 러시아 - 카자흐 - 티베트 - 할하 - 오이라트 - 청나라 등으로 이루어진 굉장히 머리 아픈 외교전 양상으로 치달았는데 이걸 다 하나의 글에서 말하고자 하면 나도 괴롭고 보는 여러분도 괴로울 것이다. 티베트에 대한 이야기만 간단하게 하도록 하자.
강희제가 원하는것은 (복속된)몽골의 평화였다. 말하자면 머리 위에서 골치 아픈 일을 일으키지 말라는 것이었다. 강희제는 그 고명한 달라이 라마 5세가 몽골의 평화에 협력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무언가 반응이 이상했다.
티베트의 사절 선파릉감복(善巴陵堪卜)은 달라이 라마의 밀지를 강희제에게 전달했는데, 밀지에서 달라이 라마는 되려 투시예투 칸과 젭종단바 쿠툭투를 잡아 가르단에게 넘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러모로 살펴봐도, 달라이 라마는 가르단을 편애하고 그에게 지원을 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달라이 라마 5세는 몽골의 평화는 커녕 가르단의 군사 작전을 계속해서 지지지해주고 있었고, 티베트에 영향을 보이는 호쇼트 몽골은 물론 할하 몽골에도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듯 보였다. 강희제는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냈다.
"밀지의 내용은 액노특(오이라트)와 객이객(할하)의 화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오. 달라이 라마는 항상 중새을 구제하는 데 힘썻거늘, 선파릉감복이 전한 서신은 달라이 라마의 뜻이 아닌것 같소."
강희제는 달라이 라마 5세가 저러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이는 당연한 일이다. 달라이 라마 5세는 이미 진작에 죽었으니 말이다! 죽은 사람의 속내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지금 강희제가 보고 있는 달라이 라마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저 사이에 대한민국을 몇개나 넣을 수 있는지 보자. 저리 머니 속임수도 통했을 것이다.
1682년, 라싸에서 달라이 라마 5세는 눈을 감았다. 그러나 이 사실은 철저한 비밀로 남았다. 이를 지시한 사람은 제파 상게 갸초였다. 이인자인 그는 달라이 라마 5세의 부재시엔 자연히 1인자가 되는 것이었다. 달라이 라마 5세의 사망이 모두에게 밝혀지면 마땅히 윤회전생한 다음 달라이 라마를 올려야 했기에 1인자의 위치를 포기 할 수 밖에 없게 되었고, 워낙 명망이 대단한 달라이 라마 5세의 이름으로 통치하는것이 대외적 관계에서도 유리한 면이 있었을 것이다. 호쇼트 몽골 달라이 칸의 영향력을 벗을 기회이기도 했다.
이렇게 되어 5세 달라이 라마의 죽음은 몽골이나 중국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고, 현장에서는 뻔한 연극이 펼쳐지고 있었다. 실제 달라이 라마 5세는 죽어서 포탈라 궁의 보좌에 앉을 수 없었으므로, 대신 법왕과 얼굴이 비슷한 강양찰파(江阳札巴)라는 인물이 전면에 나섰다. 그는 달라이 라마가 밀법 수행을 위해 오랫동안 정좌에 들어가야 하므로, 외부인을 만날 수 없으니 모든 일을 제파에게 말하라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또 이게 일이 맞아 떨어지는 것이, 가르단이 라싸에서 수행을 할때 동문이었던 인물이 바로 제파 상게 갸초였다. 이렇게 되니 제파는 동지인 가르단을 지원해 호쇼트 등을 모두 날려버릴 생각에 부풀게 되었다. 이는 강희제의 의도와 완전히 정 반대였지만, 강희제로서도 설마 사기극을 짐작 할 순 없었다. 그는 다만 달라이 라마의 주위 사람들이 그를 미혹 하고 있지 않나 의심 할 수 있을 뿐이었다.
제파가 달라이 라마의 명의로 행한 모든 일은 강희제의 심기를 거스르고 있었다. 달라이 라마(실제로는 제파)는 "평화를 위해서" 라는 목적으로 제륭(濟隆)이라는 인물을 파견했다. 헌데 정작 제륭은 가르단에게 전쟁을 그치라고 촉구하기는 커녕, 되려 그를 중용하고 전쟁의 일자를 택해서 제사 의식을 거행하고 독경까지 해주었다.
이후 벌어진 울란부통 전투에서 가르단은 "낙타의 다리를 묶어, 이 낙타의 벽으로 보호망을 만드는" 희대의 전법을 구사하여 청나라에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청군 역시 가르단에게 큰 타격을 입혔으나, 위기의 순간 나타난 제륭은 "평화 협상" 을 이야기 하며 피해에 질린 청나라 지휘관들을 유혹했고, 그 사이 가르단은 쏜살같이 달아나고 말았다.
이 두달간의 원정에 소모된 자금은 300만냥에, 병사들의 채무를(폭동이 일어나지 않게) 황제가 대신 갚아주는 액수는 1600만 냥에 달했다. 엄청난 자금이 소모되었지만, 달라이 라마가 보낸 사절의 농간으로 승리를 차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는 명백한 배신 행위였지만, 강희제는 아직 설마 달라이 라마 5세가 배신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서신을 보냈다.
"오이라트와 할하가 서로 불화하니, 짐이 그대에게 누차 사신을 보내 양국의 화해를 조정했고, 그대도 항상 짐의 명에 따라 양국에 라마를 보내 화의를 제의했소. 그대가 보낸 라마들이 맡은 바 임무를 다하고 노력했다면 오이라트와 할하는 이미 전쟁을 끝냈을 것이오. 그대의 근시와 제륭 등이 사사로운 이익 때문에 짐과 그대의 뜻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으며, 제륭은 가르단에게 협조하고 있소이다. 이것은 제륭 혼자서 꾸민 일이 아니라 그대의 근시가 이익을 탐하여 그대를 기만하고 가르단에게 영합하려는 것이 분명하오."
여기서 말하는 '근시' 란 제파 상게 갸초를 말함이다. 강희제로서는 달라이 라마 5세가 허깨비라는 사실을 짐작조차 할 수 없었으니, 이 모든것은 중간에 제파가 장난질을 벌이는 일이라 여기고 그 자를 경계하라고 전한 것이었다. 문제의 근원이 제파라는 점에 있어서는 강희제의 짐작이 맞았으나, 사태는 너무나 뜻밖의 일이라 제대로 진실에 다가갈 수 없었다. '제파를 조심하라' 라는 문서를 보았을 실제 인물이 '제파' 였을테니, 얼마나 우스운 일이 아닌가?
'문제는 제파' 라는 글에 모골이 송연해졌을까? 제파는 '달라이 라마' 의 명의로 용서를 구하고 제륭을 옹호했다. 하지만 강희제는 "죄를 지은 인물을 관대하게 대한다면, 어찌 백성들을 대하겠는가?" 라고 말하며 제륭을 처벌하기로 하였다. 이에 불안해진 탓인지, 강희 32년 겨울 제파는 달라이 라마의 명의로 '제파' 에게 작위를 하사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강희는 이미 이 제파라는 작자에 대해 불신감이 큰 상황이었지만, 달라이 라마 5세가 공훈이 막대하고 (살아있었다면) 나이도 연로한데 그저 거절할수도 없어 제파를 '토백특국왕' 으로 봉하고 금으로 만든 인장을 하사했다. 인장에는 '장와적달뢰라마교홍선불법왕포심달아백적지인' 이라는 요란한 칭호가 새겨졌다.
만일 여기서 제파가 적절히 만족했다면, 꼬리는 밞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제파는 사실상 황교의 지배자로 봉해지고도 여전히 가르단에 대한 지지를 멈추지 않았고, 사신을 보내 가르단의 칸 작호를 취소 하지 말고 청해 등지에 주둔한 청나라 병사들을 철수해줄 것을 요구하는 너무나 속 보이는 짓을 해버렸다. 강희제는 격분하여 제파를 질책했다.
"제파는 이민족인데, 어찌 철수를 요구하는가? 이는 가르단을 옹호하고자 함이 아닌가? 짐은 가르단을 청의 적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가르단은 지금도 할하를 잡으려고 하고 있으니 청군을 철수시킬 순 없다. 청을 침입하면 곧 섬멸 시킬 것이다!"
이 시점에 이르러, 드디어 강희제는 "달라이 라마가 죽었을 가능성" 을 염두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나 이상했던 것이다. 강희제는 판첸을 불러 새로운 티베트 불교의 지도자로 삼으려고 했지만, 제파는 이를 저지했다.
하지만 드디어 꼬리가 잡히고 말았다. 1696년 강희제는 차오모드에서 가르단에 대하여 그야말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가르단의 세력은 거의 괴멸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수많은 노획물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정말 우연스럽게도 게중에는 제파 상게 갸초와 가르단의 왕래 문서가 발견되었다. 또, 포로를 통해 달라이 라마는 이미 입적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졌다. 드디어 모든 진상이 폭로된 것이었다. 강희제는 즉시 사람을 티베트로 파견해 진상을 알게 되었으며, 당연히 분노하였다.
"너는 이미 오래 전에 작고한 달라이 라마가 여전히 생존해 있다고 사칭하였다. …… 달라이 라마는 지대보혜라마(地大普慧喇嘛)로서, 본 조가 호법의 주(主)가 되어 교왕한 지 60여 년이 되었으니, 그 부음이 있으면, 당연히 짐에게 알렸어야 했다. 그런데 너는 이를 숨기고 많은 이를 속이면서 가르단(喝爾丹)에 의지하여 군사를 일으켰으니, 그 죄가 매우 크다. …… 달라이 라마가 죽은 뒤에 너는 사사로이 달라이 라마를 가리키면서 가르단을 속였다. …… 네가 만약 잘못을 뉘우쳐 쫑카빠의 도를 존승하고, 달라이 라마가 작고한 시말을 상주하여 밝힘과 동시에, 판첸 호톡투를 받들어 라마교를 주재하게 한다면 …… 짐은 앞서 너를 대우한 것처럼 특별한 은총으로 우대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짐은 반드시 네가 달라이 라마와 판첸 호톡투를 속이고 갈단을 도운 죄를 물어, 운남, 사천, 섬서 등의 대병을 일으켜 가르단을 격파한 전례와 같이, 짐이 친히 너를 토벌하거나 혹은 제왕(諸王) 대신을 보내 너를 토벌할 것이다."
"너는 짐의 사신에게 말하길, 오이라트 4부가 너의 호법주(護法主)라 하였지만, 네가 오이라트 4부를 불러 너를 돕게 하면, 짐은 그들이 어떻게 너를 도울 것인지 두고 볼 것이다."
청나라는 곧 전 몽골에 이 소식을 알렸다. 이미 패배한 가르단에게 있어서, 이는 결정적 타격이 되었다. 가르단은 달라이 라마의 지지를 받고 싸운다고 했는데, 그 달라이 라마가 허깨비라는 것이다.
사기꾼임이 들통난 제파는 완전히 굴복하고 관대한 처분만을 바랬으며, 새로운 달라이 라마를 세워 통치해야만 했다. 그러나, 곧 이어 구시 칸의 후손인 라짱 한의 공격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뒤에는 청나라의 암묵적인 지지가 있었다.
라짱 한
제파는 책략을 통해 호쇼트 몽골의 영향력을 티베트에서 일소하기를 바랬겠지만, 가르단의 패배는 이를 좌절 시켰고 되려 호쇼트 몽골인 라짱 한에게 살해되는 최후를 맞이했다. 그 후 라짱 한은 순전히 자기 사람인 인물을 달라이 라마로 내세웠고, 청나라는 곧 라짱 칸을 ‘익법공순한(翊法恭順汗)’으로 책봉함으로써, 그의 조처를 모두 기정 사실로 받아들였다.
그 후 강희제 말년에 이르러 준가르의 체왕 랍탄은 1717년, 수하 체링 돈둡(tsering dhondup)을 시켜 6천에서 1만여명의 병력으로 라싸를 향해 진군하게 했다. 그는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알렉산드로스 3세" 라는 표현까지 받은 엄청난 원정을 통해(그는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산맥을 건너, 메마른 땅을 1만여리나 지나 공격해 온 것이다!) 라싸로 진군했다. 청나라 만주족 장수인 어룬터는 수천여명의 병력과 함께 급히 출동했지만 그 자신을 포함한 모든 병력이 전멸했고, 라짱 한도 살해되었으며, 포탈라 궁은 약탈되었고 달라이 라마는 사로잡혔다.
허나 강희제의 14황자 윤제는 시닝에서 무려 30만의 군대를 모으기 시작했고, 이후 호쇼트 몽골의 남은 병력과 연합하여 10만이나 되는 군대를 이끌고 연갱요 등과 라싸로 진군하였다. 1720년 9월 24일 연갱요는 라싸에 도착하였다. 준가르의 병력은 승산 없는 싸움을 피해 이미 퇴각한 후였다.
이미 수차례나 페위되고 바뀐 달라이 라마의 자리에, 청나라는 새로운 인물을 다시 올려 놓았다. 이로써, 티베트 성직자와 아시아의 통치자가 이를 후원하는 오랜 관계는, 청나라가 티베트의 실질적인 군사 세력이 됨으로서 변화하기 시작했다. 70여년간 티베트를 좌지우지 하던 몽골 세력은 거진 일소되었고, 사실상 티베트는 청제국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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