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와 티베트 불교, 그 운명적인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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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 달라이 라마, 악왕롭샹가초(Ngawang Lobsang Gyatso)
불교는 그 유래가 매우 오래된 종교이고, 유목 세계나 내륙 아시아의 나라들에게도 그다지 생소한 것이 아니었다. 여러 중국의 선비족 계열의 정권들, 위구르, 요, 금, 서하, 원나라 등과 불교는 적지 않은 관계가 있었다. 그런데 정작 본토인 인도에서는 이 불교가 쇠퇴하였고, 주요한 승려들은 히말라야 산지는 물론 티베트로 거쳐를 옮겼다. 그 결과 12세기를 전후아 티베트의 불교게는 인도 불교의 계승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런데 16세기 무렵, 투메트 몽골의 수령인 알탄 칸(AltanKhan)은 강력한 세력을 바탕으로 명나라의 수도 베이징을 포위하는 경술의변(庚戌之變)을 일으켰고, 서쪽으로는 그 세력이 티베트이 미쳤다. 이때 알탄 칸은 3세 달라이 라마를 만났으며, 이 영향으로 티베트 불교는 몽골의 전역에 전파되었다.
이후 17세기 초원의 역사는 할하와 오이라트 몽골 등의 동서 대립, 호쇼트 정권 등등 여러 부족과 정권이 세력을 과시하는 복잡한 형태가 되었다. 이 과정을 전부 설명하는것은 되려 혼란만 줄 뿐인데, 여하간에 이런 분쟁 동안 몽골의 여러 정권은 각자의 정치적 정통성과 위상의 제고를 높일 필요가 있었다. 종교를 잘 이용한다면 이 목적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때문에 여러 몽골의 부족들은 교단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으니, 이로 인해 달라이 라마가 속한 겔룩 교단은 중앙 아시아와 막북의 초원을 넘나드는 거대한 종교적 권위의 중심인 동시에 불교 세계 내부의 중재자로서 영향력을 마구마구 확대해 나갔다. 달라이 라마를 비롯한 겔룩 교단의 고위급 승려들을 만나가 위해 몽골 각지의 승려들이나, 혹은 유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세속 지배자들은 끊임없이 라사로 몰려 들었다.
이리하여 17세기 라사는 가히 동방의 바티칸이자, 달라이 라마는 교황을 떠올리게 하는 권위에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게중에 절정은 역대 달라이 라마 중 가장 위대한(물론 종교적 의미로 보면 달라이 라마는 전부 위대하겠지만) 인물로 평가받는 달라이 라마 5세의 시대였다. 온갖 찬란한 법회, 만 여 가지의 예물, 몽골의 위대한 지배자들, 명망 높은 고승들이 한 데 모여 있었다. 할하 좌익과 우익의 분쟁 등 몽골 내부의 온갖 정치적 대립을 조율하기 위해 겔룩 교단의 인물들이 파견되었으며, 승려들의 기록은 대게 정치적인 언급을 자제하고 있는게 안타깝긴 하나 이러한 예는 너무나 많아서 일일히 예를 드는것이 의미 없을 지경이다.
이제 불교 세계의 지역 질서 속에서 티베트의 라사는 종교적 의미로서나, 정치적 의미로서나 중심지의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특히, 묀란 첸모(smon lam chen mo), 소위 새해기원대법회(新年祈願大法會), 대기원법회(大祈願法會)가 열리는 기간에는 티베트는 물론, 몽골 전역에서 몰려드는 인파로 라사는 엄청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대기원법회는 티베트 력 정월 초하루에서 16일간 진행되는 티베트 최대의 불교 행사로, 라사의 주요 사원에서 다양한 불교 의식이 진행됨은 물론 겔룩 교단의 승려들은 엄격한 시험을 거쳐 학위를 수여 받았다.
이 거대한 축제에는 티베트는 물론 몽골의 승려, 그리고 여러 세속 군주들이 한데 모여 종교는 물론 정치적 현안을 한데 모여 이야기 하는, 단순한 공의회(公議會)를 뛰어넘는 엄청난 정치적 의의를 가지고 있었다. 앞서 말했다시피 승려들의 저작이 정치적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는 한계가 있지만, 매년 조금씩 바뀌는 주요 시주의 명단이나 그들이 나누었던 짦은 대화 속의 실마리 조차도 시대 상황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정도이다. 워낙 거물급 인사들이 모이다 보니, 자리를 배치하는것만도 상당히 중요한 문제였다.
그런데, 이러한 질서 체제 속에 하나의 집단이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한때 변방의 야만인으로 치부받으며 제대로 된 정치적 공동체조차 만들어내지 못했던 여진족들은, 만주 집단의 지도력 아래에서 실로 경이적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확장을 계속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결코 단발적인 정복이 아니었다. 그저 칼로 상대를 발 아래 깔아뭉개는 수준의 정복이었다면, 만주족은 제국을 이뤄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소수의 만주족만으로는 그러한 것이 불가능 했기에, 청조는 일전에 중국을 정복한 이민족 정권과는 달리 한족들에 손을 내밀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사실, 그들이 중원으로 진출하기 전 단계에도 만주족의 공동체에는 상당한 숫자의 한족이 있었다.
이렇게 "이민족 오랑캐의 군주" 인 청나라의 지배자들이, 어떻게 유교적 권위를 가진 지도자로서 자신들을 포장하고 한족들을 조화시키려 했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다(물론, 모든 일이 그렇듯 웃음 지으며 내미는 손 뒤편에는 승복하지 않은 이들을 위한 칼과 주먹이 있었다. 이는 유목민족을 청나라가 대할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청나라가 포용해야 할 대상은 한족들 뿐만이 아니다. 그들의 공동체에는 몽골인들도 많았으니, 몽골인들을 포섭해야할 필요가 있었다.
* 만주족은 300명을 1니루로 하였고, 다섯개의 니루를 1잘란(甲喇 : 1500명)으로, 5개의 잘란을 1구산(固山 : 7500명)으로 했는데 여기서 구산이 바로 우리가 잘 아는 팔기의 기(旗) 이다. 누르하치 즉위 직전에는 이러한 니루가 400여 니루가 되었는데, 만주 - 몽골의 혼성 니루가 308개, 몽골의 니루가 76개, 한군의 니루가 16개(5000여명) 정도 되었다.
청나라의 정권이 가진 이중성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다. 그들은 중국에서는 자신들을 중화세계의 지배자로 연출했고, 유목세계에서는 이전의 칸들과 같은 모습을 보였다. 청나라가 유목인들에게 칸과 같은 권위를 가지고자 한다면, 단순히 무력의 지배자가 되어서만은 안될 것이었다. 몽골을 철저하게 계승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몽골인들에게 권위를 가지고 있는 티베트 불교를 끌어안을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말인가?
모든 사람들이 잘 알고 있다시피 만주족 집단은 광대한 유라시아 대륙의 가장 극동에 자리를 잡고 있다. 또한 그들의 의미있는 정치적 연합체 - 말하자면 국가적인 조직을 갖춘것은 극히 짦은 시간이었으니, 불교 문화에 있어서는 변방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라사를 중심으로 한 거대한 불교적 세계관에서는 한발 물러서 있었던 참이었다. 청나라는 이러한 불교 세계의 관계망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싶어했다.
이러한 청나라의 티베트 불교에 대한 구애는 굉장히 일찍부터 시작하였다. 1621년, 후금의 지배자 누르하치는 몽골의 코르친(科爾沁) 부족과 연맹을 맺으면서 한명의 라마승을 초청하였다. 이 무렵 누르하치는 몽골의 여러 부족과 연맹을 맺고 있는 등의 시기였는데, 따라서 티베트 불교의 라마들과 안면을 터놓는 일은 외교적으로 상당한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다.
티베트 불교가 만주인들과 연이 닿은것은 이때가 처음 이지만, 중국의 영향을 받은 불교 자체는 여진인들에게 꽤 일찍부터 퍼져있었다. 또한 누르하치 역시도 상당히 독실한 불교 신자였기에, 그는 개인의 호감과 외교, 정치적 목적이 모두 더해져 이 라마를 굉장히 정중하게 대접하였다. 즉 라마가 자리에 들어오자 자신 역시 몸을 일으켜 악수를 하고, 나란하게 앉아 연회를 베푸는 등 말이다. 이 라마는 오래 있지 못하고 죽었지만, 그 영향으로 만주인들의 집단에는 최초로 티베트 불교의 사원이 세워졌다. 1625년 10월에는 한 라마가 몽골 통치자의 학대를 피해 수많은 무리를 이끌고 오는 일도 있었다.
누르하치의 뒤를 이은 홍타이지 역시 티베트 불교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파악하고 있었다. 1632년 몽고의 차하르(察哈爾)를 정복할 적에는 그곳에 있는 라마 사찰을 철저하게 보존하도록 엄명을 내렸고, 투항한 라마승이 금불상을 바치자 대규모 라마사원을 측조하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홍타이지는 이보다 훨씬 큰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었다. 바로 이렇게 어떻게든 닿아보려고 할 정도로 거대한 권위를 가진, 그리고 그 권위를 가진 종교의 심장이자 모든 것인 달라이 라마를 직접 초청하려는 준비를 했던 것이다. 성사만 되면 불교 세계에서 만주족의 입지는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커질 만큼, 정말 대단한 기획이었다.
확실히 홍타이지는 여러가지 면에서 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그들이 산해관을 너머 입관하기 이전인 1637년 경에 홍타이지의 의도는 시행되고 있었는데, 욱일승천 하는 기세의 청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던 할하 몽골의 실력자들은 즉시 이 문제에 대해 굉장히 민감하게 생각하면서 홍타이지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이 당시 청나라는 지리적인 상황 때문에 단독으로 티베트와 연결될 수 없었다. 이것은 청나라가 불교 세계의 네트워크에 편입되기 어려웠음을 보여주는데, 결국 여러가지 문제 때문에 달라이 라마 초청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청나라는 집념을 다해 이를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그들이 중국에 입관한 후 순치제 시절에 드디어 달라이 라마 5세의 초청을 이뤄내고 만다.
달라이 라마의 당시 권위를 살필 수 있는 점은, 이 초청 과정에서 나온 논의만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달라이 라마 측은 중원을 지배한 거대 제국인 청나라의 군주에게 "여름에 만나자, 몽골의 초원에서 만나자." 등 무리한 요구를 했는데, 결국 설득 끝에 북경까지 달라이 라마를 초청하는데 간신히 성공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순치제도 자금성의 안에서 기다리는 것이 아닌, 직접 궁성 밖으로 나가 정중하게 그를 맞아들이는 퍼포먼스를 취해야 했다.
달라이 라마 측의 기록은 이러하다.
"화살 4개가 날아갈 만큼 거리까지 간 후, 나는 말에서 내려 걷기 시작했고, 황제도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는 서로 십여 보씩을 걸은 후, 손을 맞잡고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그 후 황제는 허리 높이의 의자에 앉았고, 나로 하여금 가까이에 앉도록 했는데, 나는 황제의 의자보다 조금 낮은 자리에 앉았다. 차를 마실 때, 나에게 먼저 마시라고 했지만, 나는 감당할 수가 없는 일이라고 하여 우리는 동시에 함께 마셨다. 이처럼 나를 대하는 예의가 돈독했다."
이 만남을 묘사한 라사의 포탈라와 티베트 남부 삼예 사원의 벽화를 보면, 당시의 상황을 느낄 수 있다. 이 그림에서 유일무이한 중화세계의 군주인 순치제는 달라이 라마 보다 살짝 위에 앉아 있긴 하지만, 그것은 정말 살짝일 뿐이다. 두 명은 거의 동격으로 표현되고 있다. 말하자면 불교 세계의 양대 지주임을 상호 인정하는 것이다.
순치제는 또한 귀환을 준비하는 달라이라마에게 책문을 내려 주었다.
"하늘의 보살핌으로 시간을(현재를) 다스리는, 황제의 명령, 내가 듣자 하니, 모두를 아울러 다스리는 자와 홀로 선한 자가 근원을 밝히는 도리는 같지 않다고 하며, 세상을 떠난 자와 세상에 존재하는 자가 가르침을 세우는 이치 또한 다르다고 한다. 만약 그렇다면, 마음을 밝게 하고, 천성에 따른 행위를 분명히 하며, 온 세상을 좋은 방향으로 이끄는, 만민의 영도자는 모두 한 가지 뜻으로 통하게 된다. 롭상잠소(=롭상갸쵸) 달라이라마 당신은 빛나는 지성을 바르게 키우고, 지혜가 매우 깊은 까닭으로, 마음과 행동 모두를 다스려, 일체의 사물을 헛된 것이라고 하고, 그로써 불법을 널리 알려 우매한 중생을 가르쳐 이끌었으니, 불법이 서쪽에서 성하여, 그 선한 이름이 동쪽에 알려진것을 아버지가 들어 찬양하고, 그대(달라이라마)가 미리 하늘의 뜻을 알고,
'용의 해(1652년)에 만나도록 합시다.'
라고 하였다. 나는 하늘의 보살핌으로 시간을 다스리며, 천하를 평정한 후, 진정으로 초청하기에 적당한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지금 보아하니, 사람됨이 자애롭고, 언사에 절도가 있으며,총기와 현명함, 학식을 고루 갖춘 등 은혜를 베풀고, 이치를 궁구하는 문을 널리 열었으니, 이는 마치 밝은 길 위의 계단과 배 같으며, 또는 불법이 높은 산, 하늘의 별 같음이다. 이에 나는 인장을 주어, 세상의 모든 불교 교단을 이끄는, 달라이라마로 추대하였다. 적당한 때에 가서 불교를 융성하게 한 까닭으로 모두 기뻐하며 연회를 베풀도록 하였다. 불법을 떨치게 하고, 수없이 많은 중생을 구제하였으니, 이것으로 상중의 상이라 하겠다. 이로 인해 인장을 주었다."
이는 중화제국의 주인으로서 내릴 수 있는 가히 최고의 찬사일 것이다. 달라이 라마와 청나라는 이로 인해 WIN - WIN 관계를 이룰 수 있었다. 즉 청나라는 달라이 라마 교권에 절대적인 지위를 부여했고, 그 지지자로서 청조의 입장을 술회함으로서 불교 세계 내부에서 양자가 갖는 입지를 분명하게 하였다. 교단의 보호자로서, 보다 많은 시주층을 확보하려고 했던 티베트의 요구와 불교 세계에 참여하기를 원하던 청나라의 입장은 완전히 맞아 떨어졌다.
과거 홍타이지가 머릿 속에 그린 대로 이 만남은 내륙 아시아에서 실로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달라이 라마 5세가 북경으로 향하는 길, 그 길마다 수많은 인원이 따라붙어 대규모 법회가 매일 같이 열렸으며, 각지의 시주와 승려가 운집하여 엄청난 성황을 이루었다. 달라이라마의 행로 뿐만 아니라 그가 북경에 머물던 기간에도 줄지은 인파가 몰려들었으며, 불교계에 산적해 있는 문제를 판결해 줄 것을 부탁하는 승려들의 면담도 줄을 이었다.
무협지 식으로 말하자면 서장의 일대거사가 출현하니 수많은 사람들은 물론, 평소 얼굴조차 볼 수 없었던 은퇴해 있던 노고수들 마저 놀라 다 튀어나와 그를 만나기 위해 모이는 모습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이러한 광경 속에 본래도 강력했던 달라이 라마의 영향력이 더욱 거대해진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이 만남으로 인해 드디어 청나라는 드디어 당시 내륙아시아의 관계망에 진입하였고, 불교 세계의 변방에서 중심이 되었다. 중국 역사상 최대의 판도를 이루어냈던 청 제국이 중앙 아시아로 가는 첫 발걸음은 이렇게 화려하게 내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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