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사(金史) 본기(本紀) 8세 태조(太祖) 아골타(阿骨打) 국역 3부

 안녕하십니까. 길공구입니다.

고려 초중기 국제관계를 알아 보고자, 금사 초입 부분을 국역하고 있습니다.
본기1~3까지만 작업할 예정입니다.

1편 : 본기1 1세 시조(始祖)  함보(函普) http://cafe.naver.com/booheong/80490
2편 : 본기1 2세 덕제(德帝) 오로(烏魯) 
               3세 안제(安帝) 발해(跋海)
               4세 헌조(獻祖) 유가(綏可)
               5세 소조(昭祖) 석로(石魯)
               6세 경조(景祖) 오고내(烏古乃) http://cafe.naver.com/booheong/80574
3편 : 본기1 7세 세조(世祖) 핵리발(劾里缽) http://cafe.naver.com/booheong/81056
4편 : 본기1 7세 숙종(肅宗) 파자숙(頗刺淑) http://cafe.naver.com/booheong/81345
5편 : 본기1 7세 목종(穆宗) 영가(盈歌) http://cafe.naver.com/booheong/81511
6편 : 본기1 8세 강종(康宗) 오아속(烏雅束) http://cafe.naver.com/booheong/81570
7편 : 본기2 8세 태조(太祖) 아골타(阿骨打) 1부 http://cafe.naver.com/booheong/81679
         본기2 8세 태조(太祖) 아골타(阿骨打) 2부 http://cafe.naver.com/booheong/81862

사전보고 번역하는 것이라, 오역이 많습니다.
수정할 부분 알려 주시면, 바로 수정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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收國元年正月壬申朔,群臣奉上尊號。是日,即皇帝位。
수국(收國/금 태조의 연호) 원년(1115년) 1월 임신일(壬申日) 초하루에, 
군신(群臣)이 존호(尊號)를 봉상(奉上/받들어 올림)하였다.
이날, 황제(皇帝)의 위(位)에 나아갔다. 

上曰:
「遼以賓鐵爲號,取其堅也。賓鐵雖堅,終亦變壞,惟金不變不壞。金之色白,完顏部色尚白。」
상(上/임금)이 이르기를
「요나라는 빈철(賓鐵/강철)로 호(號)로 삼아, 그 견고함을 취하였다. 
   빈철이 비록 견고하지만, 결국에는 또한 변괴(變壞/변하여 무너짐, 녹이 슬고 부러짐)하니, 
   오직 금(金)만이 변하지 않고, 무너지지 않는다.
   금(金)은 색은 백(白)이니, 완안부(完顏部)의 색 또한 백(白)이다.

于是國號大金,改元收國。
이로부터 국호(國號)를 대금(大金)이라 하며, 수국(收國)이라 개원(改元/연호를 고침)하였다.


丙子,上自將攻黃龍府,進臨益州。州人走保黃龍,取其餘民以歸。
병자일(丙子日)에, 상(上/임금, 황상)이 장차 몸소 황룡부(黃龍府)를 공격하고자, 익주(益州)가 내려다 보이는 곳까지 진군했다.
익주의 사람들이 황룡부를 지키고자 달아났는데, 그 남은 백성을 취하고는 돌아왔다.

遼遣都統耶律訛里朵、左副統蕭乙薛、右副統耶律張奴、都監蕭謝佛留,騎二十萬、步卒七萬戍邊。
요에서 도통(都統) 야율와리타(耶律訛里朵)와 좌부통(左副統) 소을설(蕭乙薛), 우부통(右副統) 야율장노(耶律張奴), 
도감(都監) 소사불류(蕭謝佛)을 파견하여, 기병(騎兵) 20만, 보졸(步卒) 7만을 변경의 수(戍/수자리,군영)에 머물게 하였다.

*요사에는 도통 야율와리타(耶律訛里朵)가 야율알이타(耶律斡裡朵)로 기록되어 있음

留婁室、銀朮可守黃龍,上率兵趨達魯古城,次甯江州西。
누실(婁室)과 은출가(銀朮可)가 머물러 황룡부를 방비하고, 상이 병을 인솔하여 달로고성(達魯古城)으로 달려가,
영강주(甯江州) 서쪽에 머물렀다.

*금사 권72 누실((婁室) 열전에 의하면 누실은 완안부 사람이고, 은출가는 누실의 조카임. 모두 성을 완안(完顏)으로 사용

遼使僧家奴來議和,國書斥上名,且使爲屬國。庚子,進師,有火光正圓,自空而墜。
요의 사신 승가노(僧家奴)가 와서 화친을 의논 하였는데, 
국서(國書)에 상의 이름을 드러내고, 또한 제멋대로 속국(屬國)으로 삼았다.
경자일(庚子日)에, 군대가 나아갔는데, 완전히 둥근 화광(火光/불과 같은 환한빛)이 있어, 스스로 하늘에서 떨어졌다.

上曰:
「此祥征,殆天助也!」
상이 말하길
「이 상서로운 정벌을, 반드시 하늘이 도울것이다!」

酹白水而拜,將士莫不喜躍,進逼達魯古城。上登高望遼兵若連雲灌木狀,顧謂左右曰:
「遼兵心貳而情怯。雖多不足畏!」
백수(白水/하얀 물)를 부어 절하자, 장사(將士/장졸)들이 희약(喜躍/기뻐 날뜀)하지 않는 자가 없었고, 
진군하여 달로고성에 가까이 갔다.
상이 고지에 올라 요병(遼兵)을 바라보니 연운관목(連雲灌木)의 형상이자, 좌우를 돌아보며 이르러 말하길
「요병(遼兵)의 마음이 둘이니 실상은 겁내고 있다. 비록 많지만 두려워 할것 없다! 」

*연운관목상(連雲灌木狀) : 구름이 잇달은 것처럼 가지가 우거진 관목의 상, 즉 굉장히 많음을 뜻함.

遂趨高阜爲陣。宗雄以右翼先馳遼左軍,左軍卻。左翼出其陣後,遼右軍皆力戰。
드디어 높은 언덕으로 재촉하여 진을 세웠다.
종웅(宗雄)이 우익(右翼)으로 요의 좌군(左軍)을 먼저 질주하여 공격하자, 좌군이 물러났다.
좌익(左翼)이 그 진의 후방으로 출격해, 요의 우군(右軍)과 힘을 다해 싸웠다.

婁室、銀朮可沖其中堅。凡九陷陣,皆力戰而出。
宗翰請以中軍助之。上使宗幹往爲疑兵。宗雄已得利,擊遼右軍,遼兵遂敗。
누실(婁室)과 은출가(銀朮可)가 그 중견(中堅/중군)을 찔렀다.
모두 아홉번이나 진에 빠지었는데, 모두 힘을 다해 싸워 탈출했다.
종한(宗翰)이 중군(中軍)을 돕고자 청하였다. 
상이 종간(宗幹)으로 하여금 의병(疑兵/적군을 속이기 위한 가까 병사)으로 하여 보냈다.
종웅이 그후 얼마 되지 않아 승리하여, 요의 우군을 격파하니, 요병이 드디어 패하였다.

乘勝追躡,至其營,會日已暮,圍之。黎明,遼軍潰圍出,逐北至阿婁岡。遼步卒盡殪,得其耕具數千以給諸軍。
是役也,遼人本欲屯田,且戰且守,故並其耕具獲之。
승기를 타고 뒤를 추격하여 뒤쫓아, 그 영(營)에 이르고, 날이 이미 저물어서야 회합하여, 포위하였다.
여명(黎明)에, 요군이 포위를 뚫고 나왔는데, 드디어 아루강(阿婁岡)에 이르기까지 축배(逐北/패주하는 적을 쫒아감)하였다.
요의 보졸(步卒)이 진에(盡殪/전멸)하였으며, 그 경구(耕具/농기구) 수천개를 획득하여 각군에 주었다.
이 일은, 요인이 본래 둔전(屯田/군사로 농사를 지어 군량을 자급함)하고자, 
한편으로는 싸우고 한편으로는 수비하고자 하였는데, 이런 연고로 겸하여 그 경구를 모두 획득하였다.

*요사 달로고성 전투 부분
五年春正月, 下詔親征, 遣僧家奴持書約和, 斥阿骨打名. 阿骨打遣賽刺復書, 若歸叛人阿疏, 遷黃龍府於別地, 然後議之. 
都統 耶律斡裏朵等與女直兵戰於達魯古城, 敗績. 
(천경天慶/요 천조제의 연호) 5년 (1115년) 봄 1월에, 친정(親征/임금이 친히 정벌에 나섬)한다는 조서를 내리고,
승가노(僧家奴)에게 화의를 약조하는 서신을 가지고 보내니, 아골타(阿骨打)의 이름이 드러났다.
아골타가 새자(賽刺/賽剌새랄)에게 다시 서신을 보내와, 
만약 배반자 아소(阿疏)를 보내 준다면, 황룡부(黃龍府)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가겠다 하니, 그런 연후로 의논하였다.
도통(都統) 야율알이타(耶律斡裏朵)등에게 달로고성(達魯古城)에서 여진병과 싸우게 하였는데, 패적(敗績/패전)하였다.

*송막기문에 의하면 20만의 요군을 보고 초기에 금군이 항복하려 하였다고 기록됨



二月,師還。
2월에, 군대가 귀환했다.


三月辛未朔,獵于寥晦城。
3월 신미일(辛未日) 초하루에, 요회성(寥晦城)에서 사냥하였다.


四月,遼耶律張奴以國書來。上以書辭慢侮,留其五人,獨遣張奴回報,書亦如之。
4월에, 요의 야율장노(耶律張奴)가 국서(國書)를 가지고 왔다.
상이 서사(書辭/글중의 언사)가 만모(慢侮/거만하고 업신여김)하다 하여, 그 5인을 억류하고, 
(야율)장노 혼자만을 돌려보내 회보(回報)하니, 글이 또한 같았다.

*요사에는 야율장노(耶律張奴)를 야율장가노(耶律張家奴)로 기록.
*글이 또한 같았다 : 요의 서신이 오만 무례하자, 역시 똑같이 오만하게 글을 써 보냈다는 뜻으로 추정
*요사에는 이대목을 이렇게 기록함
  遣耶律張家奴等六人齊書使女直, 斥其主名, 冀以速降. 
  야율장가노(耶律張家奴)등 6인에게 제서(齊書/가지런한 글)를 가지고 여진에게 보내어,
  그 주인의 이름이 드러냈고, 속히 항복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 추정 : 요에서는 나름 반듯하게 서신을 보냈는데, 국서에 아골타라는 이름을 명기하자
               아골타가 감히 내이름을 썼다고 사신 6명중 5명을 억류하고
               달로고성 전투에서 우도통을 맡았던 야율장가노만 풀어줌


五月庚午朔,避暑于近郊。甲戌,拜天射柳。故事,五月五日、七月十五日、九月九日拜天射柳,歲以爲常。
5월 경오일(庚午日) 초하루에, 근교(近郊)로 피서(避暑)하였다.
갑술일(甲戌日)에, 배천사류(拜天射柳) 하였다.
고사(故事)에, 5월5일과 7월15일 그리고 9월9일에 배천사류하였는데, 해마다 상례로 삼았다.

*배천사류(拜天射柳) : 명절날에 하늘에 절을 하고 버드나무에 화살을 쏘는 여진족 고유 명절행사


六月己亥朔,遼耶律張奴復以國書來,猶斥上名。上亦斥遼主名以復之,且諭之使降。
6월 기해일(己亥日) 초하루에, 요의 야율장노(耶律張奴)가 다시 국서(國書)를 가지고 왔는데, 여전히 상의 이름을 드러냈다.
상이 역시 요 임금의 이름을 드러내 이로써 다시 보내고, 또한 항복하기를 타일렀다.

*요주명(遼主名) : 요 천조황제(天祚皇帝)의 휘(諱/이름)는 연희(延禧), 즉 야율연희
*요사 1115년 6월 기사中
六月 壬子,張家奴等還,阿骨打複書,亦斥名諭之使降。癸醜,以親征諭諸道。
(중략) 是月,遣蕭辭剌使女直,以書辭不屈見留。
6월 임자일(壬子日)에, 장가노(張家奴)등이 돌아 왔는데, 아골타(阿骨打)가 다시 서신을 보내와, 
역시 (요 임금의) 이름이 드러났으며 항복하기를 권유했다. 
계축일(癸丑日/癸醜日)에, 친정할 것임을 각도에 알렸다.
이달에 소사랄(蕭辭剌)으로 하여금 여진에 보내었는데, 글을 문제삼아 견해를 굽히지 않고 억류하였다.



七月戊辰,以弟吳乞買爲諳班勃極烈,國相撒改爲國論勃極烈。辭不失爲阿買勃極烈,弟斜也爲國論昊勃極烈,
甲戌,遼使辭剌以書來,留之不遣。九百奚營來降。
7월 무진일(戊辰日)에, 동생 오걸매(吳乞買)를 암반(諳班) 발극렬(勃極烈)로 삼고,
국상(國相) 살개(撒改)는 국론(國論) 발극렬(勃極烈)로 하였다.
사부실(辭不失)은 아매(阿買) 발극렬(勃極烈)로 삼고, 동생 사야(斜也)는 국론호(國論昊) 발극렬(勃極烈)로 하였다.
갑술일(甲戌日)에, 요사자 사랄(辭剌)이 서신을 가지고 오자, 억류하여 돌려 보내지 않았다.
구백해부(九百奚部)의 영(營/진영)이 항복하여 왔다.
 
*암반(諳班)/암판(沐版) : 여진어로 대신(大臣)을 뜻함
*발극렬(勃極烈) : 여진어로 본시 부족장을 뜻함, 
                         열전 제8 살개 열전에 勃極烈, 女直之尊官也 /발극렬은, 여진의 존귀한 관리를 말한다 고 기록됨
*아골타와 오걸매 재위 당시에는 암반(諳班/암판沐版), 국론(國論), 아매(阿買), 국론호(國論昊/화측和申)
  총 4인이 황제를 보좌하여 발극렬에 임명 되었다고 함.
*요사 1115년 7월 기사中
秋七月辛未,宋遣使致助軍銀絹。丙子,獵於嶺東。是月,都統斡里朵等與女直戰於白馬濼,敗績。
가을 7월 신미일(辛未日)에, 송에 사신을 보내 원군과 은, 비단을 이르게 하였다.
병자일(丙子日)에 영동(嶺東)에서 사냥하였다.
이달에, 도통(都統) 알리타(斡里朵)등에게 여진과 백마락(白馬濼)에서 싸우게 하였는데, 패적(敗績/패전)하였다.



八月戊戌,上親征黃龍府。次混同江,無舟,上使一人道前,乘赭白馬徑涉,曰:
「視吾鞭所指而行。」
諸軍隨之,水及馬腹。後使舟人測其渡處,深不得其底。
8월 무술일(戊戌日)에, 상이 황룡부(黃龍府)를 친정하였다. 
혼동강(混同江)에 머물러, 배가 없었는데, 상이 한 사람으로 하여금 앞서 길을 가게 하며 ,
자백마(赭白馬/붉고 흰색이 섞인 말)를 타고 지름길로 건너가게 하고, 말하길
「내가 채찍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고 가라」
각군이 따라가니, 물이 말의 배에 닿았다.
후에 배사람으로 하여금 그 도처(渡處/물을 건너는 곳, 나루)를 측량하게 하였는데, 깊어 그 밑바닥을 알수 없었다.

熙宗天眷二年,以黃龍府爲濟州,軍曰利涉,蓋以太祖涉濟故也。
희종(熙宗/금 3대 황제) 천권(天眷/금 희종 연호) 2년(1139년)에, 황룡부(黃龍府)를 제주(濟州)라 하였는데, 
군을 이롭게 건넜다 하여, 태조를 숭상하여 건널(涉) 제(濟)라고 한것이다.

*요사 1115년 8월 기사中
八月甲子,罷獵,趨軍中。以斡里朵等軍敗,免官。
丙寅,以圍場使阿不為中軍都統,耶律張家奴為都監,率番、漢兵十萬;
蕭奉先充禦營都統,諸行營都部署耶律章奴為副,以精兵二萬為先鋒。
餘分五部為正軍,貴族子弟千人為硬軍,扈從百司為護衛軍,北出駱駝口;
以都點檢蕭胡睹姑為都統,樞密直學士柴誼為副,將漢步騎三萬,南出甯江州。
自長春州分道而進,發數月糧,期必滅女直。
8월 갑자일(甲子日)에, 사냥을 마치고, 군중(軍中)으로 뒤쫓아 갔다. 
알리타(斡里朵)등이 패전하였기에, 면관(免官/면직,해임)하였다.
병인일(丙寅日)에, 위장사(圍場使/국립 사냥터 관리) 아부(阿不)를 중군도통(中軍都統)으로 삼고, 
야율장가노(耶律張家奴)를 도감(都監)으로 삼아, 솔번부(率番部)와 한병(漢兵) 10만을 주었다.
소봉선(蕭奉先)을 충어영(充禦營) 도통(都統)으로 삼고, 제행영도부서(諸行營都部署) 야율장노(耶律章奴)를 부도통(副都統)으로 삼아, 정병(精兵) 20만으로 선봉을 삼았다.
여분(餘分/남은)의 5부(部)는 정군(正軍/중앙군)으로 삼고, 귀족자제(貴族子弟) 천여명은 경군(硬軍/창병)으로 삼았으며,
백사(百司/많은 관리)가 호종(扈從)하여 호위군(護衛軍)으로 삼았는데, 북쪽 낙타구(駱駝口)로 출발하였다.
도점검(都點檢) 소호도고(蕭胡睹姑)를 도통(都統)으로 삼고, 추밀직학사(樞密直學士) 시의(柴誼)를 부도통(副都統)으로 삼아,
장차 한족 보기병 3만으로, 남쪽 영강주(甯江州)로 출발하였다.
장춘주(長春州)에서 부터 길을 나누어 진군하고, 수개월치 양식을 베풀어, 기필(期必)코 여진을 멸(滅)하고자 하였다.


九月,克黃龍府,遣辭剌還,遂班師。至江,徑渡如前。
丁丑,至自黃龍府。
己卯,黃龍見空中。
癸巳,以國論勃極烈撒改爲國論忽魯勃極烈,阿離合懣爲國論乙室勃極烈。
9월에, 황룡부(黃龍府)를 함락하여, 사랄(辭剌)를 귀환케 하여 돌려 보내고, 이윽고 군이 돌아왔다.
강에 이르자, 전과 같이 지름길로 건너갔다.
정축일(丁丑日)에, 몸소 황룡부에 이르렀다.
기묘일(己卯日)에, 황룡(黃龍/누런용)이 공중(空中)에서 보였다.
계사일(癸巳日)에, 국론(國論) 발극렬(勃極烈) 살개를 국론홀로(國論忽魯) 발극렬(勃極烈)로 삼고,
아리합만(阿離合懣)을 국론을실(國論乙室) 발극렬(勃極烈)로 삼았다.


十一月,遼主聞取黃龍府,大懼,自將七十萬至駝門。附馬蕭特末、林牙蕭查剌等騎五萬、步四十萬至斡鄰濼。上自將御之。
11월에, 요 임금이 황룡부(黃龍府)를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두려워 하여, 몸소 70만명을 이끌고 타문(駝門)에 이르렀다.
부마(附馬/임금의 사위) 소특말(蕭特末)과 임아(林牙/요 관명) 소사랄(蕭查剌)등이 기병 5만과 보병 40만을 이끌고 
알린낙(斡鄰濼)에 이르렀다.
(이에) 상이 몸소 군을 거느리고 갔다.


十二月己亥,行次爻剌,會諸將議。皆曰:
「遼兵號七十萬,其鋒未易當。吾軍遠來。人馬疲乏,宜駐于此,深溝高壘以待。」
上從之。
遣迪古乃、銀朮可鎮達魯古。
11월 기해일(己亥日)에, 효랄(爻剌)에 행차(行次)하여, 제장(諸將)이 모여 회의하였다. 모두 말하기를
「요병이 70 만이라 일컫는데, 그 예봉이 마땅히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군대는 멀리 왔습니다.
   인마(人馬)가 피핍(疲乏/피곤)하니, 마땅히 여기에 주둔하여, 해자를 깊게 파고 보루를 높게 하여 대기 하시지요.
상이 따랐다. 
적고내(迪古乃)와 은출가(銀朮可)를 보내 달로고(達魯古)를 진압하게 하였다.

丁未,上以騎兵親候遼軍,獲督餉者,知遼主以張奴叛,西還二日矣。是日,上還至熟結濼,有光見于予端。
정미일(丁未日)에, 상이 기병(騎兵)을 이끌고 친히 요군을 염탐하여, 군량을 감독하는 자를 사로 잡았는데,
요 임금이 (야율)장노(張奴)가 배반하자, 서쪽으로 귀환한지 2일이 지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날에, 숙결락(熟結濼)에 이르러 귀환하였는데, 여단(予端)에서 빛이 있는 것을 보았다.

戊申,諸將曰:
「今遼主既還,可乘怠追擊之。」
上曰
「敵來不迎戰,去而追之,欲以此爲勇邪?」
무신일(戊申日)에, 제장(諸將)이 말하길
「지금 요주가 이윽고 귀환하는데, 깔보고 업신 여기니 추격(追擊)하는 것이 옳습니다. 」
상이 말하길
「적이 와 영전(迎戰/적을 맞아 싸움)하지 않았는데, 추격하여 간다면, 간사한 용기로서 이를 하고자 함이냐?

衆皆悚愧,願自效。
上復曰:
「誠欲追敵,約齎以往,無事餫饋。若破敵,何求不得。」
무리가 다 송괴(悚愧/죄송스럽고 부끄러움)하니, 스스로 본받기를 원(願)하였다.
상이 다시 말하길
「진실로 적을 추격하고자 한다면, 가져갈 것을 줄여서 갈 것이고, 양식도 가져 가지 않을 것이니, 
   만약 적을 격파하면, 어찌 구하여 획득하지 못하겠는가.

衆皆奮躍,追及遼主于護步答岡。是役也,兵止二萬。
上曰:
「彼衆我寡,兵不可分。視其中軍最堅,遼主必在焉。敗其中軍,可以得志。」
무리가 다 힘써 빨리 달려, 요주를 호보답강(護步答岡)에서 추급(追及/뒤쫓아 따라붙음)하였다.
이 싸움에서는, 병력이 2만에 그치었다.
상이 말하길
「저쪽 무리보다 우리가 적으니, 병력을 나누는 것은 옳지 않다. 그 중군(中軍)이 가장 견고해 보이니, 
   요주가 반드시 거기에 있을 것이다. 그 중군을 깨트려, 이로서 뜻을 이루는 것이 옳다.

使右翼先戰。兵數交,左翼合而攻之。遼兵大潰,我師馳之,橫出其中。遼師敗績,死者相屬百餘里。
獲輿輦帟幄兵械軍資,他寶物馬牛不可勝計。
우익(右翼)으로 하여금 먼저 싸우게 하였다. 병이 촘촘하게 맞대었는데, 좌익(左翼)이 합(合)하여 공격하였다.
요병(遼兵)이 크게 무너졌는데, 우리 군대가 질주하여 공격하여, 그 중군을 가로질러 나왔다.
요 군대가 패적(敗績/패전)하여, 죽은자가 백여리에 이어진 형상이였다.
여련(輿輦/임금의 수레)과 연악(帟幄/장막과 휘장) 및 병계(兵械/전쟁도구), 군자(軍資/군자금, 군량)를 획득하니,
보물(寶物)을 말과 소에 실었는데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是戰,斜也援矛殺數十人,阿離本被圍,溫蒂罕迪忽迭以四謀克兵出之,完顏蒙刮身被數創,力戰不已,功皆論最。
이 전투에서, 사야(斜也)가 창을 잡고 수십명을 죽였으며,
아리본(阿離本)이 포위를 당하자, 온체한(溫蒂罕)이 4모극(謀克)의 병력으로 출격 하였는데 홀연히 침범하였으며,
완안몽괄(完顏蒙刮)은 수차례 상처를 입어, 전력으로 싸울수 없었는데, 
공을 다 논하여 으뜸으로 하였다.

蕭特末等焚營遁去,遂班師。來穀撒喝取開州,婆盧火下特鄰城,辭里罕降。
소특말(蕭特末)등이 영(營)을 불사르고 도망쳐 버리자, 드디어 군이 돌아 왔다.
살갈(撒喝)이 개주(開州)를 취(取)하여 곡식을 가져오고, 
파로화(婆盧火)는 특린성(特鄰城) 아래에서, 사리한(辭里罕)의 항복을 받았다.


*요사에서의 호보답강 전투 기록
冬十一月,遣駙馬蕭特末、林牙蕭察剌等將騎兵五萬、步卒四十萬、親軍七十萬至駝門。
十二月乙巳,耶律張家奴叛。
戊申,親戰於護步答岡,敗績,盡亡其輜重。
겨울 11월에, 부마(駙馬) 소특말(蕭特末), 임아(林牙/요 관명) 소찰랄(蕭察剌)등에게 장차 기병 5만과 보졸 40만을 보내고,
친군(親軍/친히 군을 이끔)하여 70만을 이끌고 타문(駝門)에 이르렀다.
12월 을사일(乙巳日)에, 야율장가노(耶律張家奴)가 배반하였다.
무신일(戊申日)에 호보답강(護步答岡)에서 친전(親戰)하였으나, 패적(敗績)하여, 그 치중(輜重/군수 물품)을 전부 잃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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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골타 3부 요약
-1115년 1월 요 야율알리타에게 기병20만, 보병7만을 접경 달로고성 주변에 배치시킴
-달로고성에 금이 선제 공격 개시,
 대승하여 농기구 수천개 획득, 
 포위된 요기병은 도주하고, 보병은 전멸시킴
-1115년 1월 요 천조제 친정 발표함

-1115년 1월~7월 서로 서신 배틀 벌림
 요 : 아골타! 속국으로 인정해 줄테니 이제 그만
 금 : 나 황젠데 아골타? 너나 항복해 야율연희
 요 : 연희? 많이 컸다.
 금 : 지금이라도 아소 보내면, 황룡부에서 발뺌
 ※ 서신배틀을 담당했던 야율장가노 2차 친정에서 배신함

-1115년 7월 달로고성에서 패배한 알리타 재차 여진과 백마락에서 싸웠으나 패배
  아율알리타 해임

-1115년 8월 금이 황룡부를 선제 공격
-이에 요 천조제는 전병력을 동원하여 황룡부로 감(1차 친정)
 병력구성
 1. 선봉 정병 20만 (대장 소봉선, 부장 야율장노)
 2. 솔번부+한족병사 10만(대장 아부, 부장 아율장가노)
 3. 중군(5부 병력)
 4. 호위군 귀족자제 1천+관리
 5. 별동군 : 한족 보기병 3만 (대장 소호도고, 부장 시의)
 → 천조제는 출전 2일전까지 사냥터에 있었음
 → 총병력은 정확히 나온것이 선봉20만, 솔번+한족 10만, 별동군 한족 3만, 호위군 1천으로 33만 1천임
     중군의 병력은 기록 되어 있지 않으나 요 5부의 병력을 산출하면 될듯함.
     송막기문에는 50만으로 되어 있음
 
-1115년 9월 금 황룡부 함락
-금태조 요 천조제에게 사신을 보내, 아소를 송환하면 황룡부에서 군을 돌릴것이라 함 (요사)
  → 천조제 대노, 반드시 여진을 멸할 것이라 천명 → 금태조 부하들에게 항복하던가, 나를 죽이던가 양단결단 요구
  → 금 제장들 일제히 아골타를 따르겠다고 말함
-선봉 야율장노(솔번부+한족 10만 부대의 부장)가 수하 무리를 이끌고 수도로 회군
 위국왕(魏國王) 야율순(耶律淳/훗날 북요 선종)을 옹립코자 하였으나
 야율순 야율장노 편에선 처남 소체리를 참수하고 광평전에서 천조제를 기다림
-천조제 회군하여 상경으로 돌아옴
-야율장노 무리 수만을 이끌고 발해인과 결탁하여 각주를 돌아 다니면서 약탈하다가 상경으로 다시 쳐들어와 궁을 범함.
-천조제 계요적여진 아골산이 선봉으로 야율장노군을 격파함
-야율장노 사로잡혀 요참형 당함


-1115년 11월 선봉 기병5만+보병40만(대장 소특말, 부장 소찰랄) 알린낙에 보냄
  → 천조제도 동참하여 총 70만 타문에 이름 (2차 친정)
      야율장노의 배반으로 한족 보병 비율이 크게 올라갔을 것으로 생각
-1115년 11월 금군 2만 효랄에 당도결전을 피하고 방비태세 갖춤

-1115년 12월 야율장가노 배반
  → 천조제 회군 → 금군 추격하여 호보답강에서 요군 격파 → 요군 군수품 모두 팽개치고 도주
  → 죽은자가 백여리(약 39km)에 걸쳐 이어졌음.
      ※참고로 1010년 고려의 강조 30만이 거란군에 패배 하였을 당시 수십리에 걸쳐 3만의 고려군이 죽었음을 감안하면
         5~10만 정도가 전사하지 않았을까 추정하지만 근거는 전혀 없음^^;
  → 송막기문에는 10만 요군이 금군에 항복함

  ※ 개인적인 요군 70만 패인 분석
      → 2번에 걸친 친정 상황에서, 거란족 대신들의 연이은 반란과 전장이탈
      → 이후 거란족 기병의 비율이 크게 낮아지고, 한족 보병의 비율이 크게 올라감
      → 2차 친정에서도 천조제는 눈앞의 여진 보다는, 후방의 반란군 토벌이 우선이였음
          2번에 걸친 회군에 의해 군의 사기는 크게 떨어졌을 것이고,
          특히나 회군하는 한족 보병에게 있어서는, 여진과의 사투는 기대키 어려웠을 것임
      → 반면에 여진족은 호기를 놓치지 않고, 2일전에 회군한 요군을 따라 잡음
      → 다량의 포로 획득(약 10만), 사상자(약 5~10만) 
          특히 다량의 포로는 1116년초 태조가 명을 내려 용서해 줌으로서, 금군에 편입된 것으로 보임

-회군한 천조제 한병 모집하며, 거란인들 못믿기 시작함.
-송막기문에 따르면 천조제가 한족에게 거란족을 없애라 지시하자, 곳곳에서 학살이 벌어졌다고 함.
 (본시 거란족이 한족을 죽여도 벌을 받지 않아, 한족의 원한이 깊게 쌓였는데, 이 명이 떨어지자 한족병사들이
  거란족을 보는 족족 모조리 죽였다고 함)

-8세 아골타 4부에서 계속-

P.S) 본글은 동의 없이 어느 곳에나 담아 가셔도 됩니다. 출처는 남겨주시면 고맙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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