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황혼, 강건성세의 여명(35) ─ 황제로서, 아버지로서

 청군은 큰 피해를 입었고, 막대한 물자를 소모했으며, 가르단은 도망쳤습니다. 비록 정부와 공식 기록이 이 전투를 무엄한 가르단에 대한 존엄한 천자의 승리로 포장한다고 쳐도, 실질적인 효과를 보자면 잘 쳐져야 무승부였으며, 본질적인 부분을 보자면 아무것도 해결된것이 없었습니다. "가르단을 뿌리부터 줄기까지 없애겠다." 고 소리친 강희지만, 머나먼 홉도(Qobdo)에 청나라의 손길은 닿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부터 청조는 자신들의 영향력을 그 먼곳까지 닿을 수 있게 하는 작업에 착수했고, 청조의, 그리고 역사상 중국 제국의 관료 체제가 그야말로 정점에 올랐다고 말할수도 있는 1750여년대, 마침내 그 꿈을 실현하게 됩니다. 아직은 먼 미래의 일입니다.



 가르단은 도망가버렸고 강희는 이에 대해 화를 냈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가르단이 멀리 달아나서 훼방 놓을 수 없고, 청군이 대규모로 북방에 온 지금이 할하 부족들 사이에서 강희의 영향력을 넒힐 최고의 기회였습니다. 강희는 즉시 대규모 회합을 열것을 제안하고 할하의 칸들을 소집했습니다.


 어사 심개증을 비롯한 정부 대신들은 강희가 또다시 장성 밖으로 나가려는것에 반대했습니다. 날씨가 좋지 않고 건강상의 문제가 있기 때문에, 최소한 일정을 연기 해야 한다는 의견이었습니다. 그러나 강희는 어떤 대리자도 아닌, 자신이 직접 나서야만 해결이 가능하다고 고집을 부렸으며, 1691년 5월 9일, 군사들을 이끌고 북방으로 떠났습니다. 목적지는 베이징에서 250킬로미터가 떨어진 초원의 가장자리, 돌론노르(Dolonno) 였습니다. 



 돌론노르, 현재 다륜(多倫)의 호수.



 강희의 명령에 따라 젭종단바 쿠툭투, 투시예투 칸, 자삭투 칸의 동생 체왕 자부, 체첸 칸은 최고 서열을 차지했고, 나머지 몽골 귀족들은 그보다 낮은 서열을 받고 거대한 연회석에 자신들의 자리를 배정받았습니다. 550여명이 넘는 몽골 왕공들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강희는 원초적인 힘을 과시하기 위해 압도적인 군사 행진을 벌였으며, 동시에 대포를 발사하고 화기를 전시하여 몽골의 칸들에게 두려움을 주었습니다. 강희 스스로가 말에 탄 채 포 70여문을 지휘하면서 무력 시위를 벌였던 것입니다. 


 회합에서 강희는 투시예투 칸과 젭종단바가 가르단의 침략을 불렀다고 비난했으며, 다른 칸들이 용서를 구하자 못이기는척 그들을 용서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강희는 할하 몽골의 어려움에 대해 물질적인 지원을 할것을 맹세했지만, 동시에 그들을 각 기로 편제하여 정해진 영지에 정착시키려는, 즉 그들이 마음대로 움직일 권리를 빼앗는 작전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기 체제에 편입된다면 이제 만주의 관리들은 할하 몽골인들이 초지 사이를 이동하는것을 엄격히 통제하게 될 것입니다. 르네 그루세는 이 방식을 지난 수천년간 야만족들을 다루던 '중화'의 행정적 시스템과, 힘으로 상대방을 눌러서 복종하게 하는 유목민족들의 시스템이 결합된 형태라고 지적했습니다.


 한편, 패주하고 도망친 가르단은 절멸은 피하였지만, 당연하게도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청나라군보다야 보급 문제에서는 어느정도 자유롭지만, 제아무리 몽골 사람들이라고 해도 사막의 모래를 먹고 살 수는 없는 일입니다. 가르단의 군대는 극심한 고갈 상태였고, 무엇보다 안심하고 머물만한곳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물고기를 잡아먹어서라도 버텨야 했습니다. 


 유목민들에게 있어, 그리고 초원에서는 청나라도 별다를게 없지만, 가축은 중요한 재산이자 움직이는 군수물자입니다. 낙타의 성을 쌓기도 했고 전투중에 잃어버린 가축들도 많아 가르단은 우선 가축의 숫자를 보충해서 부대의 위기를 회복하기 위해 할하 부족들의 동물을 약탈하려고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러자 가르단은 더 먼 서쪽으로 향했습니다.


 강희가 걱정하는것은 가르단이 중앙 아시아의 오아시스 지역들을 장악, 독자적인 생산력을 보유하여 강대한 세력이 되는것입니다. 하지만 울란부통까지 가는데만도 버거워하던 상황에서, 그 먼곳까지 대규모 원정군을 파견할 능력은 청나라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고, 되려 이 시기에는 변경 주둔지의 규모를 축소해서 줄이는데 중점을 둘 정도였습니다. 소규모 군단을 보내려는 시도는 종종 있었지만, 곧 곡물과 말을 보급하는 절망적인 문제에 직면해 실패했습니다.


 무엇보다 할하 몽골인들이 대부분 전란으로 피난민들이 되어서, 이들과 동맹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청은 그들에게 구호 작업을 해주어야만 했고, 덕분에 식량 문제는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농업 경제를 가지고 있는 당시의 중국에서도 이것은 버거운 일이었던 것입니다.


 체왕 랍탄의 문제도 있었습니다. 청나라는 체왕 랍탄과 접촉하면서 가르단을 고립시키려고 했는데, 1691년에는 슬쩍 나서서 가르단에게 체왕 랍탄과의 화친을 주선해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청나라의 목적은 억지로 평화를 만들어서, 몽골인들에게 자신들의 제국이 초원 평화의 주재자임을 보여주려는 의도였지만, 가르단은 자신을 공격한 체왕 랍탄과 거짓 미소를 지은채 악수하는 일을 거절했습니다. 오히려 체왕 랍탄에게 가는 청의 사절이 가르단의 부하에게 죽는 일까지 생겼습니다. 가르단은 책임을 부인했습니다만……


 이 시기 가르단은 러시아와 접촉하려고 끊임없이 시도했으나, 네르친스크 조약이라는 괴물은 그를 좌절시켰습니다. 제파 샹게 가초가 달라이 라마의 이름을 빌려 영향력을 보여 가르단을 도우려 했지만, 청은 이를 차단시켰습니다. 이를테면 제파 샹게 가초는 달라이 라마의 명의로 "샹게 가초가 뛰어나니 공식적으로 인장을 요청한다." 는 요청을 하면서, 가르단의 칸 작위를 박탈하지 말라고 요구했습니다. 청은 인장의 요구는 받아들였지만, 가르단 문제는 단 한마디로 거절해버렸습니다.


 "외번(外藩)에게는 중국 황제에게 상소할 권리가 없다."






 





모든 개입이 차단된 상황에서, 강희는 가르단에게 끊임없이 항복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가르단은 자신의 무례한 언사는 사죄한다고 하면서도, 5~6만냥의 하사금을 요청했습니다. 강희는 가르단이 베이징으로 직접 오면 내려주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물론 가르단이 실제로 베이징으로 올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가 조금이라도 북경 가까이 온다면, 강희가 직접 나서서 그를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유인책이었습니다.



 


1695년 9월, 강희는 가르단을 유인할 더 확실한 계획을 짜기 시작했습니다. 호르친 왕공 빌리게투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가르단에게 예전에 초청장을 몇개 받은 적이 있습니다. 강희는 그를 이용해서 가르단에게 "호르친 부가 항복하려고 하고 있고, 동쪽으로 마중 나오라" 고 요청했습니다. 강희는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친히 대군을 이끌고 벽력처럼 그를 쫒을 것이다. 그는 다시는 달아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확실히 가르단을 절멸할 것이다!"


 계획이 모두 준비가 되고, 1696년 4월 1일, 마침내 강희는 다시 한번 친정에 나섰습니다. 이번에는 이전과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하면서 말입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말할 필요도 없이 군수 물자의 보급입니다. 중국 북부에서 몽골의 사막까지 수천마일의 거리를 보급하는 문제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한 문제였습니다. 가르단이 달아난다면, 그토록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고 해도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다행이 1695년 8월, 가르단이 청의 변경으로 이동하는 모습이 포착되었습니다. 그보다 더 접근하지는 않고 있었지만, 가르단은 케룰렌 ─ 툴라 강 유역에서 머물며 겨울을 보내려는 준비를 하고 있었고, 이보다 더 중국 가까이 끌어들일 방법은 없었습니다. 케쿨렌 강 근방으로 6천여명에 가까운 부대가 모여들고 있었고, 보고에 따르면 가축중에 양의 숫자는 적었지만 낙타와 말을 상당 부분 회복한것으로 판단되었습니다.


 더욱이 가르단이 황제에게 보내는 여러가지 진정서로 판단할때, 가르단은 아직까지 청나라의 계획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강희는 짐짓 점잔을 빼며 서로간에 명확한 경계를 확정하자면서,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만나자는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했습니다.


 다른 문제가 또 있었습니다. 강희는 초원의 가르단도 상대해야했지만, 조정에서 신료들도 설득해야 했습니다. 대다수 관료들은 사막으로의 장거리 행군 계획에 별다른 열성을 보이지 않았고,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쪽들도 좀 더 기다려서 가르단이 가까이 오면 움직이자고 제안했습니다. 지금대로 계획을 밀고 나가면 강희는 혹독한 겨울의 몽골 초원으로 진격해야 합니다. 




 전형적인 대륙성 기후인 몽골은 겨울이 10월 초부터 찾아오며, 겨울철의 야간에는 영하 45도 까지 내려가는 일도 있습니다. 또 연중 구름이 없는 날씨가 257일이나 되어 자외선에 그대로 노출이 되어야 합니다. 추위를 둘째치더라도, 겨울에 행군한다면 케쿨린 강에 도착할 경우, 봄에 새싹이 아직 나지도 않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말에게 먹일 풀이 줄어들게 된다면, 기동성은 극단적으로 제약될 것입니다.


 하지만 강희는 결단을 이미 내렸습니다. 황제의 옥체에 대한 걱정, 황제가 도성을 비울 동안 야기될 혼란, 엄청난 원정 비용, 여러 불확실성에 대해 제국의 관료들은 끊임없이 걱정스러운 태도를 내었으나, 강희는 한족 관료들에게 화를 내지 않고 참았습니다. 대신에, 자신이 몸이 아팠던 첫번째 싸움에서는 덕분에 일을 그르쳤으며, 자신이 나서야 일을 해결할 수 있는 동시에, 자신의 부재동안 제국을 통치할 적임자로, 황태자가 있다는 것을 지적했습니다.



 황태자, 아이신기오로 윤잉(愛新覺羅胤礽)


 윤잉은 강희와 효성인황후효성공숙정혜안화숙의각민여천양성인황후(孝誠恭肅正惠安和淑懿恪敏儷天襄聖仁皇后)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입니다. 강희는 효성 황후를 매우 사랑했으나, 그녀는 두번째 자식을 낳던 중 사망했습니다. 그 후로 강희는 이 아들에 대한 애정이 깊어졌고, 또 반란등이 일어나는 상황에서 제국의 기반을 다지기 위하여, 후계자를 미리 정하지 않던 누르하치 ─ 홍타이지와는 달리 윤잉을 황태자로 지정했습니다.


"황제가 이르노니,하늘의 뜻을 이어받고 백성을 다스릴 줄 아는 옛 제왕들은 천하를 다스림에 있어 태자를 세워 나라의 근본을 탄탄히 하여 종묘와 사직에 누를 끼치지 아니하였다. 짐은 오랫동안 이에 대해 심사 숙고하였다. 열성조의 뜻을 지켜나가기 위하여 이 중대하나 경사스러운 당부를 하노라. 적장자 윤잉은 날마다 영민해지며 그 순수함을 더욱 보여주고 있나니 태황태후마마와 황태후마마의 영을 받들어 전례에 따라 종묘, 사직, 천단, 지단에 제를 올린 후 강희 14년(1675년) 12월 13일 윤잉을 황태자에 봉하오니 동궁에 거처하게 하며 만년을 이어갈 황통을 중히 여기며 사해와 천하의 마음을 잇도록 하라"

詔曰: 自古帝王繼天立極、撫禦寰區、必建立元儲、懋隆國本、以綿宗社無疆之休。朕纘膺鴻緒、夙夜兢兢。仰惟祖宗謨烈昭垂。付託至重。承祧衍慶、端在元良。嫡子胤礽、日表英奇。天資粹美。茲恪遵太皇太后皇太后慈命。載稽典禮。俯順輿情。謹告天地、宗廟、社稷。於康熙十四年十二月十三日、授胤礽以冊寶。立為皇太子。正位東宮、以重萬年之統、以系四海之心。


 청나라 역사상 황제가 황태자를 공식 석상에서 책봉한 일은 이 사례가 최초이며 유일한 경우입니다. 황제는 아들에게 제국 최고의 지식인들을 붙여 교육을 시켰고, 실제로 윤잉은 성과가 좋아 아버지를 기쁘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 부자의 마지막 이야기는 끔찍한 애증으로 결말을 맺게 됩니다.


 그러나 이때까진 괜찮았습니다. 강희는 자신이 자리를 비울동안의 대리자로 윤잉을 지목했습니다. 


 피양구(費揚古)는 유일하게 원정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인물로, 나중에 주요한 활약을 하게 됩니다. 다만 그 조차도 겨울동안 말을 살찌운 다음, 봄에 출정하는것이 낫겠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들 끝에 다시 한번 삼로군이 출발하여, 피양구가 3만명을 이끌고 서로군으로, 동로군은 1만명이 되어 떠났고, 황제가 이끄는 중군은 23,870여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실제적으로 전투에 참여한건 피양구와 강희의 양군이었습니다. 동로군은 몽골군의 동진을 저지하는 역할을 맡았던 것입니다.


 






 저 울란바토르 아래쪽으로 희끗하게 보이는 강이 바로 툴라 강입니다. 피양구의 목적은 중군이 도달하기전까지 미리 툴라강에 도착하여, 가르단의 도주로를 차단하여 그가 다시 한번 달아나는것을 막는 일이었습니다. 도성에서 서로군의 목적지까지는 총합 3천여리에 이르는 긴 길이었고, 80일 분량의 식량을 챙겼으며 50일 분량의 보급이 뒤를 따라갔습니다. 직예, 산동, 허난 지역에서 대당 6석을 실은 수레가 1333대가 동원되었습니다. 직예 총독은 수레 6천대를 제작했습니다.


 곡물 구입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기에 곡물 확보에 나선 인력은 전투에 나선 사람들과 동등한 전공을 인정받았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가난한 중국 서북의 성들은 군대의 수요를 뒷받침 하는것에 심각한 어려움을 보였습니다. 현지에서 보급할 수 있는 양은 대단히 적었고, 그렇다면 중국 내부에서 군량을 휴대하여 떠날 수는 있지만 이 경우 부대가 져야 하는 부담은 대단히 극심했습니다.


 가량 다섯달 동안 움직이려면 22,400여석이 필요했습니다. 이는 당연히 개인이 소지할 수 있는 양을 훨씬 뛰어넘는 무게입니다. 식량을 소떼로 바꾸고, 개인이 0.05석을 움직이는 것으로 바뀌여 부담을 어느정도는 줄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병사들은 식량 대신 은을 받고 간쑤 성의 시장에서 스스로 보급품을 사야했습니다. 사병은 2냥, 장교는 20냥. 부대의 뒤를 상인들이 뒤따랐고, 상인들은 거래를 했습니다. 그리고 서북 지역 출신이 많은 부대들은 현지 시장을 잘 알고 있어, 처음부터 부대에게 모든 군량을 돈으로 지불하여 알아서 사 먹도록 한 장수도 있었습니다.


 두번째 문제. 바로 말입니다. 말은 몽골과의 전투에 반드시 필요한 존재입니다. 청나라는 말을 거의 전적으로 동맹인 할하 몽골에 의존했습니다. 그들에게 수천 마리의 말을 사고, 베이징에서는 마초 30만 마리를 보내 말들을 먹였습니다. 하지만 대다수 몽골의 부족들은 가르단이 두려워 군사적인 수준의 지원은 겁내고 있었습니다. 이때 나선 사람이 바로 오이라트의 체왕 랍탄입니다.


 가르단과 원수인 체왕 랍탄은 몽골인들을 설득하여 가르단이 적이라는점을 명확히 했고, 덕분에 몽골인들은 도움을 그리 주진 못하더라도, 방관하는 태도를 취하게 되어 최소한 이 전쟁을 "여진, 한족에 대항하는 몽골 전체의 싸움"으로 만들려는 가르단의 노력을 분쇄시켰습니다. 체왕 랍탄은 그 대가로 여러가지 특혜를 제공받았습니다.


 세번째 문제. 화약입니다. 특히 강희는 화약이 승리의 열쇠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제국군의 대포는 언제나 스일를 가져다 주었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믿으며 8백근에서 1천근에 달하는 대형 포를 235문, 백근에서 8백근에 달하는 경포를 104문 동원했고, 대만과 서양의 포 등 온갖 종류의 포들이 끄집어 나왔습니다. 그 포들의 시범 사격을 보던 가르단 부대의 탈영병들은 매우 기겁하여, 이렇게 소리 쳤습니다.


 "가르단은 하루만에 괴멸될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무거운 포들을 억지로 끌고 가느라 군대의 행군은 느려졌습니다. 너무나 무거운 종류의 포들은 어느정도 배제를 시켰는데도 말입니다.


 행군 중에 부대는 엄격한 규율을 지켜야만 했습니다. 병사들은 아무리 늦어도 새벽 5시에는 기상해야 했으며, 주둔지에서 빨리 철수해야 했기에 아침에 불을 피우는것은 금했습니다. 병사들이 늦게 움직이면 장교들은 벌을 받았고, 못과 샘이 얼어있어 깨부수고 보급을 해야만 했습니다. 독이 든 우물이나 풀들이 도처에 있었으며, 말들은 움직일때마다 지치고 추위를 타서, 쉴 때도 곧바로 쉬는것이 아니라, 일부러 더 움직여 땀을 흘리게 한 뒤 쉬어야만 했습니다.


 부대의 뒤를 1만 3천명의 보급 부대가 조심스레 따라붙었지만, 여러 제약 때문에 계속해서 늦추어졌습니다. 비가 내렸고, 진창이 부대를 방해했습니다. 많은 가축들이 죽어버렸고, 병사들은 모래 언덕을 넘기 위해 버드나무 가지와 진흙으로 길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강희는 이 원정에 제르비용과 페레이라를 대동한 채 묵묵히 움직였습니다. 강희의 아들 여섯명도 함께 했습니다.


 강희는 다른 병사들이 일어나 아침 밥을 짓기도 전에 항상 먼저 일어나 초원을 행진하며 자신있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병사들 앞에서의 모습일 뿐입니다. 실제로 강희는 불안에 시달리고 있었고, 혹독한 눈보라와 부족한 물들을 볼때마다 하늘이 자신을 버린것이 아닌지 의심했습니다. 비와 눈이 끊임없이 내리고 있었고, 황제의 자신만만함도 점점 사그라 들었다가, 다시 커졌다를 반복했습니다.


 이토록 황제의 개인적인 면모를 잘 알수 있었던 것은, 그가 아들, 즉 베이징에 있는 사랑하는 황태자에게 끊임없이 편지를 썻기 때문입니다. 그는 백여통이 넘는 편지를 썻고, 이는 이상화된 모습으로 변모시킨 공식 사서의 기록들에서 볼 수 없는, '황제' 가 아닌, 강희, 아이신기오로 히오완예이라는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귀중한 이야기들입니다(언제나 가면을 쓰고 있던 건륭제는, 그토록 여행을 많이 다니면서도 북경의 가족에게 편지를 거의 쓰지 않았습니다).


 강희는 편지에서 자신에게 트집을 잡는 사람들을 벗어나, 초원의 상쾌함과 용맹스러움, 소박하고 조촐한 면모에 대한 애정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좋지 않아지고, 원정에 대한 의심이 황제의 마음 속에 일때, 그는 끊임없이 불안함을 보이며 아들에게 호소했습니다. 이런 상황이면, 강희는 아들에게 집에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들을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태자는 효성스러운 아들이다. 너는 아마도 꽃이나 새, 물고기나 짐승을 볼 때도 그토록 멀리 떨어진 소금기 있는 사막에서 고생하는, 이 불쌍한 아비를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나를 걱정하지는 마라. 너는 밤낮으로 온 몸을 바쳐 우리 나라와 구룬 부이 바이타 ─ 가정 ─의 일만 생각하라. 시간이 나면, 선대의 성공과 실패에 관한 고전과 역사책을 보면서 쉬거라."


 그리고 아들이 건강한지를 끊임없이 물어보았습니다. 강희는 온갖 자질구레한 일에 대해서 알고 싶어했습니다. 일식은 언제 일어나는가? 베이징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이제 곧 새들이 올텐데, 그들이 오면 알려다오. 강희의 기분이 가장 절망적이었던 상황에서, 그는 이렇게 편지를 작성했습니다.


 "내가 군대를 이끌고 전진할 때는, 너를 생각할 틈이 없었다. 네가 생각날 때 아비가 입을 수 있도록, 네가 입던 면사로 된 상의 네 벌과, 아마로 된 짦은 상의 네 벌을 보내려무나. 나는 토노 산에서 바얀 울란까지 정찰했는데, 진을 칠 안전할 곳이 없었다. 천지간에 할하 땅 같은 곳은 없다. 이 세상의 수백만 가지 물건 가운데, 이곳에서 가치 있는것이라고는 풀 밖에 없다."


 걱정, 그리움, 그리고 집을 떠나 기약 없는 원정을 벌이며, 비록 겉으로는 용감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또다시 궁극적으로는 승라히자 못하여 무익한 행군에 정력을 낭비할지도 모른다는 낭패함. 볼모지에서 달랑 서 있으며 침울한 표정으로 서 있는 황제. 그러나 위로받기 위해 아들에게 얼굴을 돌리고, 혈육에 대해 그리움을 나타내며, 아들의 옷을 보내달라고 요청하며, 개인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가족과 국가에 헌신하고자 하는 강희의 모습. 그 어떤 중국의 황제들 중에서도, 이토록 개인적인 이야기를 우리에게 남겨진 황제는 없었습니다. 


 황제의 기분은 하루 단위로 가장 좋았다가 나빠지기를 반복했습니다. 물론 초원에서는 용맹스런 모습만 보이려고 애를 쓰고 있었지만, 편지에서는 그의 기분이 가감없이 기록되었습니다. 강희는 끊임없이 사방의 지형, 곧 풀의 종류, 마멋 굴의 숫자, 강, 서로 다른 사막에 대한 이야기를 썻고, 별들을 관찰하며 위도를 기록했습니다. 


 강희제는 절대로 초인이 아니었습니다. 불안, 감정, 기쁨과 절망을 항상 느끼고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해야 할 일때문에 무리해서 용감한 표정을 짓고는, 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도, 다시 겉으로는 용맹무쌍한 태도를 취하였던 것입니다. 모래와 사막밖에 없는 곳에서 부대의 행군이 지체되자, 다시 쏟아 오르는 불안감 속에서, 황제는 가족들에게 보낼 색깔 있는 돌을 주워 가슴에 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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